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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말 (남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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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말(趙眜)은 고대 남월의 두 번째 왕으로, 기원전 137년부터 기원전 125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남월 무왕 조타의 손자이며, 중국어로는 Zhào Mò, 베트남어로는 Triệu Mạt으로 불린다. 조말은 민월의 침략을 한나라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으며, 한나라의 개입으로 민월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의 무덤에서는 1,000점 이상의 부장품과 함께 "문황제의 옥새"가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조말이 실제 이름임이 확인되었다. 조말은 대외 관계 속에서 남월의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남월이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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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말 (남월)
기본 정보
Zhao Mo의 옥제 매장 의복과 붉은 비단, 광저우에 전시됨
Zhao Mo의 옥제 매장 의복과 붉은 비단, 광저우에 전시됨
이름Zhao Mo (趙眜)
Triệu Mạt (찌에우 맛)
Zhao Mo (趙眜) 또는 Zhao Hu (趙胡)
Triệu Muội (찌에우 무오이)
Triệu Hồ (찌에우 호)
시호Mun Wang (文王, 문왕)
Mun De (文帝, 문제)
설명Zhao Yingqi (趙嬰斉) 이전의 남월 군주였으므로 한나라에 대해 번왕이라고 칭했지만, 국내에서는 황제나 천자라는 호칭도 사용했다.
통치
즉위기원전 137년
퇴위기원전 124년
전체 재위 기간기원전 137년 – 기원전 124년 (51세)
이전 통치자Zhao Tuo
후임 통치자Zhao Yingqi
생애
출생기원전 175년
사망기원전 124년
아버지Zhao Zhongshi
어머니Mei Zhu (Mỵ Châu, 미 쩌우)
기타 정보
왕조Zhao (Triệu)
왕가남월
묘소남월왕묘

2. 명칭

조말(趙眜)이라는 이름은 고전 중국어로 기록되었으며, 현대 중국어 발음(병음)으로는 Zhào Mò, 베트남어로는 Triệu Mạt로 음역된다.[1][2] 성씨인 趙/Triệu를 따서 베트남에서는 Triệu 왕조로 불린다.[1][2] 그의 묘호는 "문황제"(Zhào Wén Dì/趙文帝중국어 / Triệu Văn Đếvi)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조호(趙胡)'로 기록되어 있으나,[1][2] 광저우에서 발굴된 조말의 무덤에서 "조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옥새가 발견되면서 조말이 실제 이름으로 확인되었다.[1][2] '조호'는 사마천의 실수이거나, 조말과 조호가 다른 통치자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

3. 생애

무왕 71년(기원전 137년), 할아버지 남월 무왕 조타(南越武王 趙佗)가 사망하였다. 조타가 사망할 당시에 100세가량의 고령이었고, 조타의 아들은 이미 사망하였고, 손자 조말이 왕위를 계승했다. 《대월사기전서》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무왕의 아들인 중시(仲始)였다고 전한다.

재위 2년(기원전 135년), 민월왕(閩越王) 추영(鄒郢)이 남월을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위를 계승한 문왕 조말은 민심이 불안정하면서 한 무제에게 소식을 보내어 민월(閩越)이 남월을 공격하고 있다고 전하였고, 동시에 한나라 조정이 이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 무제는 남월의 요청에 화답하여 왕회한안국을 파견하고, 민월을 정벌하는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군이 남령(南嶺)을 넘기 전에 추영의 동생 여선(余善)이 반란을 일으키며 형인 추영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한나라의 군사 행동이 멈추었다.

한 무제는 그 후에 여선을 새로운 민월왕으로 봉하고 중대부 장조를 남월에 파견하고 민월이 남월을 침공한 사태를 수습하였다. 깊이 감사한 문왕은 사태 수습이 완료한 후에 스스로 한나라에 입조하였고 한 무제를 알현하였고 장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였고 동시에 태자 조영제를 한나라로 보냈고, 숙위(宿衛)하게 되었다.

장조가 귀국하고, 한 무제가 한나라에 위협이 되는 남월이 멸망되기를 두려워한 남월의 신하들은 무왕의 유훈을 내세워 문왕이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중단할 것을 건의하였다.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문왕은 병을 이유로 들어 입조를 하는 것을 거절했다.

재위 12년(기원전 125년), 문왕이 큰 병에 걸리자, 태자 조영제를 귀국하게 해달라고 한나라 조정에게 요청하였고, 문왕이 사망한 후에 귀국한 조영제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조말 묘에서 출토된 청동 칼집이 있는 상감 철 창

3. 1. 왕위 계승

기원전 137년, 할아버지 남월 무왕 조타(南越武王 趙佗)가 100세가량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왕위를 계승했다. 조타의 아들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손자인 조말이 왕위를 이었다.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조말의 아버지는 무왕의 아들 중시(仲始)였다.

기원전 135년, 민월왕(閩越王) 추영(鄒郢)이 남월을 침공했다. 조말은 민심이 불안정하여 한 무제에게 소식을 보내 민월이 남월을 공격하고 있다고 전하였고, 한나라 조정이 이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 무제는 왕회한안국을 파견하여 민월을 정벌하는 계획을 하였으나, 한나라 군이 남령(南嶺)을 넘기 전에 추영의 동생 여선(余善)이 반란을 일으켜 추영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여 군사 행동은 중지되었다.

한 무제는 여선을 새로운 민월왕으로 봉하고, 중대부 장조를 남월에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조말은 이에 감사하여 사태 수습이 완료된 후 스스로 한나라에 입조하여 한 무제를 알현하겠다고 하였고, 태자 조영제를 한나라로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장조가 귀국한 후, 한 무제에게 위협이 되는 남월이 멸망되기를 두려워한 남월의 신하들은 무왕의 유훈을 내세워 조말이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중단할 것을 건의하였다. 조말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병을 이유로 입조를 거절했다.

기원전 125년, 조말이 큰 병에 걸리자, 태자 조영제를 귀국하게 해달라고 한나라 조정에게 요청하였고, 조말이 사망한 후에 귀국한 조영제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3. 2. 민월과의 갈등과 한나라의 개입

기원전 135년, 민월왕 추영(鄒郢)이 남월을 침공했다. 왕위를 계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불안정했던 조말은 한 무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한나라 조정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 무제는 왕회한안국을 파견하여 민월 정벌을 계획했으나, 한나라 군대가 남령을 넘기 전 추영의 동생 여선(余善)이 반란을 일으켜 추영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항복하면서 군사 행동은 중지되었다.

한 무제는 여선을 새로운 민월왕으로 봉하고, 중대부 장조(엄조)를 남월에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조말은 장조에게 감사를 표하고, 태자 조영제를 한나라에 보내 숙위하게 했다.

3. 3. 한나라와의 관계

기원전 137년, 할아버지 무왕 조타가 사망하자 조말이 왕위를 계승했다. 조타가 사망할 당시 100세가량의 고령이었고, 조타의 아들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기원전 135년, 민월왕 추영이 남월을 침공했다. 조말은 한 무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한나라가 이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무제는 왕회한안국을 파견하여 민월을 정벌하려 했으나, 한나라 군이 남령(南嶺)을 넘기 전에 추영의 동생 여선(余善)이 반란을 일으켜 추영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여 군사 행동이 중지되었다. 한 무제는 그 후 여선을 새로운 민월왕으로 봉하고 중대부 장조를 남월에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조말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 한나라 조정에 방문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그의 고위 대신들은 그의 부친 무왕이 한나라와 거리를 두고 예의를 지키며 평화를 유지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반대했다.

장조가 귀국하고, 한 무제가 한나라에 위협이 되는 남월이 멸망되기를 두려워한 남월의 신하들은 무왕의 유훈을 내세워 조말이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중단할 것을 건의하였다. 조말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병을 핑계로 입조를 거절했다.

3. 4. 죽음

기원전 125년, 조말은 큰 병에 걸려 한나라 조정에 태자 조영제의 귀국을 요청했다. 조말은 재위 12년만에 사망하였고, 귀국한 조영제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4. 무덤

조말의 무덤은 1983년 광저우의 코끼리 언덕 아래 20m 지점에서 호텔 건설 부지에서 발견되어 발굴되었다. 무덤의 길이는 11m, 폭은 12m이다. 무덤은 앞쪽 방, 동·서쪽 날개 방, 주 관실, 동·서쪽 측면 방, 뒤쪽 창고 방 등 7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무덤에서는 1,000점 이상의 부장품이 나왔으며, 전차, 금·은 그릇, 악기, 그리고 순장된 사람(그의 사후에 시중들기 위해 15명의 신하가 생매장되었다)이 발견되었다. 또한 무덤 벽에 벽화가 그려진 초기 서한 시대의 유일한 무덤이기도 하다.

위에서 본 조말의 무덤


무덤에서 나온 동선 청동 항아리


남월 은상자


무덤에서는 또한 중국 무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황제의 옥새 중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이 옥새에는 "조말"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 왕의 시신이 한나라 통치자의 이름인 "문황제"임을 선언했다.

중국 유물과 함께 초원과 이란, 헬레니즘 중앙아시아 지역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무덤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은상자는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초기의 수입품이다. 또한 베트남 북부의 동선 문화에 속하는 유물도 있었다.

문왕이 훙거한 후, 남월의 도성 번위(현재의 광저우시 샹강산)에 묘가 축조되었다. 1983년,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어 '''남월왕묘'''라고 불리게 되었다. 묘 내부에서는 1000점을 넘는 부장품이 발견되었으며, 링난 지역에서 최대 규모의 묘로 꼽힌다. 1988년에는 서한남월왕박물관이 건축되어 출토품이 보존, 전시되고 있다.

『사기』에서는 남월 제2대 왕을 '''조호'''로 기록하고 있지만, 남월왕 묘에서 조말의 옥인 및 문제행새의 금인이 발굴되면서, 그 성명은 조말이 옳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남월왕묘 박물관은 광저우 제팡로에 위치해 있으며, 조말의 무덤 자리에 세워졌다.

5. 평가

조말은 민월과의 갈등, 한나라와의 관계 등 복잡한 대외 관계 속에서 남월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왕으로 평가된다. 그의 외교 정책은 실리주의와 자주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한나라의 힘을 빌려 민월의 침입을 막아낸 것은 현실적인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에 대한 의존은 남월의 자주성을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기원전 135년, 민월왕 추영이 남월을 침공하자, 조말은 한 무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왕회한안국이 파견되었고, 추영의 동생 여선이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에 항복하면서 군사 행동이 중단되었다.

조말의 무덤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은 남월이 당시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잇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6. 가계

조말(趙末)의 조부는 남월 무왕 조타(趙佗)이고, 부친은 중시(仲始)이다. 《대월사기전서》의 기록에 따르면, 조말의 아들은 남월 명왕 조영제(趙嬰齊)이다.

참조

[1] 뉴스 Exhibition Rewrites the History of Han Civilization in China https://www.nytimes.[...] 2012-06-08
[2]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an Dynasty II Columbia University Press
[3] 문서 趙嬰斉以前の南越君主であったことから、漢に対しては藩王と称していたが、国内では皇帝や天子といった呼称も使用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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